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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는 정하언에게 궁내 어제편제(御製扁題)와 광범문 및 홍화문 편액 등 여러 문을
쓰도록 명.
영조20년(1744년, 갑자년)에 하언공의 문장과 서체가 매우 훌륭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하언공에게 어제편제(御製扁題)와 홍화문(弘化門)과 광범문(光範門)등 여러문의 액을 쓰도록 명하였다. 문학∙사서(文學司書)직에 임명하고, 다시 찬집에 전심하되 매 5일마다 잠자리 가기전에 하언공이 쓴 속전에 관한 초본을 가지고 경연(經筵)장에 가면 잘 맞는지 살펴보며 혹시 새길 때 어필에 대하여 고친 곳이 있는지도 몸소 살피기도 하였다. 이에 영조는 하언공을 여러번 포상하며, 하언공의 재주와 식견은 매우 탁월하고 유능하다고 칭찬하였다. 이는 하언공이 원래 수재인데 젊고 글 잘쓰고 인품이 높았기 때문에 영조는 중책 관직으로 등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자료: 오세창, 근역서화징 178쪽, 계명구락부(학자원), 소화3년, 그리고 영조 20년(1744년)에 어제편제와 광범문 및 궁내 여러문의 액을 정하언에 쓰도록 명하였다. 정하언의 2남 정간(1733~1813, 삼가군수)의 정씨가승에 1790년 필서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