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鄭 夏彦 시문집
-Jeong Ha-on 시(遺詩)• 글씨(遺筆)∙암각∙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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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泰植 박사 저(著)
책머리에
시간은 흘러도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유럽의 벨라루스 격언이 있습니다. 본서는 “백마강 가에서 꿈을 키운 神童 미중(조선 후기 문인 정하언의 삶과 예술적 공간)”의 역사적 문화시의 후속 제Ⅱ편으로, 조선후기 영조시대 중앙 및 지방에서 주요 관직을 두루 수행하며 뛰어난 작품을 남긴 문신대사간 정하언 등이 생전에 남긴 주옥같은 역사적 시편(1640~1950)을 모아 정리한 것입니다.
주인공 정하언(鄭夏彦, 1702∽1769)은 충남 공주목사관 내 동헌에셔 태어나, 어린나이에 조실부모하고 부여현 옥호동에서 배다른 형님 내외 슬하에서 성장하면서 배움을 익힐 서당에 다닐 돈이 없었고, 끼니는 고란사에서 궂은일을 하면서 연명하고, 백마강을 엄마 품으로 의지하고, 스님 주변을 맴돌면서 학문에 대한 관심과 피나는 노력으로 주경야독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가 유년시절 고란사 감잎에 숯검정으로 글을 연습하며 쓴 분량이 백마강을 검게 물을 드릴 정도였다는 가슴 저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노총각인 18세에 사대부가인 풍양조씨 조부인과 결혼하고 각고의 노력으로 19세 되던 해(경종1년,1721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으며, 33세 되던 해(영조11년,
1735년) 증광문과 과거시험에 합격, 그 이후 약 30여 년간 영조시대 중앙 및 지방에서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속대전 편찬 주역과 조선 4대 대자액서의 명필가로서 명성을 날렸습니다. 또한 관직 근무시 당파에 휘둘리지 않고 충효, 청백리, 애민사상을 구현하여 의주부윤시절 지역 백성들로부터 기혜비(記惠碑)를 받았으며, 삼척부사시절에는 유배온 30세인 채제공을 만나 매일 시를 생산하였던 조선시대 최고의 충의와 청백리 공직자 중 한 인물이었습니다.
정하언은 백마강 기슭 부여 옥호동의 학문 수련시절을 잊을 수 없어 자호를 옥호자(玉壺子), 정옥호(鄭玉壺), 옥호거사(玉壺居士)로 명명하고 당시의 시련을 평생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살았다는 것을 청풍정기에서 밝히고 있고, 또한 만년에 이르러서 촛불을 켜놓고 밤새도록 글을 읽어 날이 밝도록 잠을 자지 아니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평생 동안 학문연구와 배움의 길을 꾸준히 지속한 당대 최고 지성의 한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직에서는 충의를 생각하며 붕당에 휩쓸리지 않은 중도 · 정도를 걸으면서 애민정신과 함께 백성들과 격의 없는 인간관계 유지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우렸습니다. 그는 꾸준하게 학문에 열중하여 많은 지식이 피어나고 혜안이 뛰어나 붓을 들고 종이에 접하면, 일을 논하고 이치를 분석함에 있어 남달리 발달한 총기와 생기로, 시문은 붓을 한번 휘두르면 완성되었으며 시문에 내재된 신비한 운치와 기특한 기운을 스스로 가릴 수 없었다고 주변 인물들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학과 시서(詩書)에 있어서 특출한 역량을 발휘하여 옥석 같은 수많은 예술적 걸출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시율, 시문의 주요시제는 뛰어난 아름다운 산과 강의 자연경관, 주변에 건립된 여러 누와 각, 일반 백성의 고단한 일상생활, 친구와의 이별과 재회, 가족들의 안부, 지역백성의 애환과 걱정,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그리는 관조적 생각 등 매우 다양한 부문으로 이른바 인품과 심오한 학문적 내공, 그리고 멋과 풍류를 아는 대가의 한마디 한마디는 바로 낙운성시(落韻成詩)하여 훌륭한 시격(詩格)을 갖춘 시가 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본 책에서는 정하언이 남긴 시율과 시문을 테마별로 구분하여 제1편 시율에서 부모님 곁, 부여현 옥호동(玉壺洞), 영남지역, 한양궁중, 의주, 삼척시 죽서루, 동해시 무릉, 삼척도후부, 명덕동, 국동(菊洞)시묘살이, 노문신(老文臣), 제2편 편액과 암각, 제3편에서 선•후친 예술공간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즉 내용에서 원문과 음역,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설을 달아 정리하였습니다. 사료는 전부 한자로 되어 있어 원작자의 깊은 의도와 시적 뉘앙스를 한글로 해설함에 있어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기고간 숨어있는 문화적 유산에 대한 적극적인 발굴과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세대가 풀어야할 커다란 숙제임이 분명합니다. 한국국유부동산연구원에서는 나라재산(국유재산중 보존용 재산)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고 있음을 느끼며 이에 적극적인 자세로 본서 집필에 노력하였습니다. 향후에도 문인 정하언에 대한 보다 많은 연구 활동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과, 산야에 묻혀 풍화 작용으로 소멸되고 있는 이 시점에 한문학 연구 석•박사과정생, 문화원 및 문화재단 시문담당자, 고서연구자, 문화해설사 등 또 다른 문인들의 작품도 발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기해년, 더운 여름날들의 서울강동연구실에서 보내며
정하언 시문집 필진 대표 鄭 泰植
올림
◇◇ 목 차 ◇◇
제Ⅰ편 시율(詩律)/
1. 낙향은 부모 옆에/
◎ 등완주봉(登翫主峰)’/
◎ 국동리지에 기록된 민가의 풍속/
2. 꽃필 무렵 옥호자(玉壺子)/
◎ 결혼(結婚)/
◎ 차중(此中)/
◎ 초화금인(草花錦人)/
◎ 가슴절린 과거시험 소식/
◎ 선비 가세와 학문도리/
◎ 붕농월(朋弄月)/
◎ 조흉록(滌胸錄)/
3. 영남에서 핀 충혈꽃(忠血花)
◎ 조양각의 정하언 시문/
◎ 조양각의 포은 정몽주 시문/
◎ 진연(塵緣)/
◎ 만만 비원망(萬萬非怨望)/
◎ 영남루전범주(嶺南樓前泛舟)/
◎ 영남루 풍류 8편/
◎ 환속(還俗)/
◎ 금일(今日)/
◎ 칠인의 회식/
◎ 만취한 학동의 주정 모습/
4. 한양 궁중에서 핀 속대전 꽃/
◎ 기요잠(起遙岑)/
◎ 내 작품의 질/
◎ 의춘객사시사일음시자여승(宜春客舍試士日吟示自如丞)/
◎ 봉화(奉和)/
◎ 서후차시(書候此時)/
◎ 자혼재이(子婚在而)/
◎ 하찰상서(下察上書)/
◎ 사입무화(思入無畵)/
◎ 하찰(下札)/
◎ 세손궁훙서(世孫宮薨逝)/
5. 의주에서 핀 기린비 화(花)/
◎ 섣달 20일 인사/
◎ 임지평(任持平)/
6. 죽서루에서 핀 채제공 화(花)
◎ 죽서루 /
◎ 독등죽서루서회(獨登竹西樓 書懷)
◎ 분선(分仙)/
◎ 오십천에 백운상인 동행/
◎ 설산신선(雪山神仙)/
◎ 신미 2월24일(辛未 二月二十四日) 편지/
◎ 죽루피서(竹樓避暑)/
◎ 진주(眞珠)/
◎ 동옥호공부해방만리도(同玉壺公浮海訪萬里島)/
◎ 진주관 답청절(眞珠觀踏靑節)/
◎ 우야증금생(雨夜贈金生)/
◎ 봉황대(鳳凰臺)/
◎ 환선굴(喚仙窟)/
◎ 칠분당(七分堂)/
◎ 야보죽서루(夜步竹西樓)/
◎ 죽서루 가송 정옥호(竹西樓歌送鄭玉壺)/
◎ 송별옥호공 야보서회(送別玉壺公 夜步書懷)/
◎ 봄비(春雨)/
◎ 응벽헌에서 옥호에게 부치다(凝碧軒簡玉壺)/
◎ 죽루동입지후월(竹樓同立之候月)/
◎ 해상춘초(海上春草)/
◎ 별 오십천(別五十川)/
◎ 별 죽서루(別竹西樓)/
7. 무릉에서 핀 옥호거사화(玉壺居士花)/
◎ 무릉석상(武陵石上)/
◎ 무릉백운상인(武陵白雲上人)/
◎ 중방무릉(重訪武陵)/
◎ 조기향무릉계차립지운(早起向武陵溪 次立之韻)/
◎ 전향흑악사음시입지(轉向黑岳寺 吟示立之)/
◎ 우음(又吟)/
◎ 동읍중서생방무릉계유회옥회(同邑中諸生訪武陵溪 有懷玉壺)/
◎ 전방용추(轉訪龍湫)/
◎ 숙지조암(宿指祖菴)/
◎ 금당(琴堂)/
◎ 별 무릉계(別武陵溪)/
8. 삼척도호부에서 핀 부사화(府使花)/
◎ 섣달그믐날 동해심동(深冬)/
◎ 신미년 2월24일/
◎ 차노(此奴)/
◎ 불지(不至)/
◎ 병중초사옥호근속(病中草謝玉壺勤速)/
◎ 제석폐호수좌(除夕閉戶愁坐)/
◎ 환류당염운구호(環流堂拈韻口呼)/
◎ 야점운동옥호부(夜拈韻 同玉壺賦)/
◎ 상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