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Ⅰ장 국동리지 역사서를 남긴 보석
제 1절 구전으로 본 국동 마을 보석
◎ 마을유래와 풍수•번영•제례.
태초에 사방을 바라보면 하늘만 보이는 몇 개의 봉우리와 계곡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흘러가면서 이곳에도 시대에 따라 날짐승들과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즉 백제가 사비성으로 천도 이후에 마을 큰산 이름을 국사봉이라 명명하여 전하고 있다. 또 동국산천록에 신라 도선국사가 다년간 후에 社와 師가 음이 같아 國社와 國師가 같아 혼용하여 왔다. 조선 숙종 때에는 강씨가 살아서 강국동(康國洞)이라고 하였다. 숙종 20년(1694년, 을묘년)에는 정무공이 공주 목사 발령으로 국동을 돌아보고 산세 모습이 하도 기이하여 직접 토지를 매입 후 자신의 묘터를 정하기까지 하였다. 숙종 25년(1699년) 11월 27일 이후 마을명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렇게 마을명부터 계곡명, 고개명, 산이름, 등을 모두 정무공 후손인 정하언공, 정조영공, 정협공이 작명을 많이 한 것 같다. 이씨조선 개국당시 한양 천도시 후 정도전(鄭道傳)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을 직접 작명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을 보면 국사봉(國士峰),도월산,(道月山) 매봉(鷹峯), 토정봉(土亭峰), 호준암(虎蹲巖), 태학치(太學峙)등 작명이 대단한 것 같다.그리고 연못에 토성을 조성하였는데 이것도 후손번창을 목적으로 하는 풍수원리를 적용하여 백호자락 산줄기 아래 길이 20보 높이 어른키 2장의 흙으로 만든 뚝 안에 정무목사 공의 묘의 신기를 막는다는 풍수상 논리로 축조하였다는 것이다.
마을 의 대표적인 이름을 처음에는 국사당(國士堂) 또는 국동(菊洞)으로 칭하여 왔는데 전래 지명이 國社와 國師(道詵國師)가 혼용되어 사용하였다. 조선 영조시절에 대사간을 역임한 정하언 공은 영조 42년 시묘살이 시절 (1765~1767년) 국동(菊洞)으로 마을명을 수정하였다. 마을 입구 남쪽 연못에 국화꽃이 있어 국담(菊潭) 이라고도 하였다. 못물은 건강에 좋다. 담(潭)이 당 (塘)과 혼음으로 당(塘)이 되었다. 조선 정조 시절 정조영 형조판서공이 국사 (菊士)로 호를 명명하기도 하였다. 국동이란 국화국(菊) 자를 닮은 지형이라 마을명도 당시 나라의 선비출신인 정무공이 공주목사가 왔다고 하여 마을명 을 국사동(菊士洞, 國士洞), 뒷산인 큰산을 국사봉 (國士峰)이라고 부르다가 현재는 국동(菊洞)과 큰 산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함축적으로 정리하면 국화는 향기를 머금고 가을을 지나 겨울 즉, 인생의 추수동장을 의미하고, 명예롭고 꽃과 같이 아름다운 사후(死後)의 세계를 상징한 그 이름 또한 매우 부드럽고 부르기가 좋다. 정무공이 전라도 화순현감을 근무한 전남 화순군 동면 국동리 (菊東里)가 있다. 마을의 지형 지세에 보면 조선 말기 정협의 국동리지 풍수론을 정리하였다. 이에 의하면 국동 마을의 국사봉(國師峰)은 태양 금성형이고, 도월산은 태음목성형, 매봉(鷹峯)은 태음 화성형으로 건(乾)과 손(巽)의 정방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토정봉의 높은 곳은 태음토성형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국사봉과 도월산, 매봉산, 토정봉은 엄마품 같이 온순 적막하고 안정감을 주는 형상이요 도월산은 용출(勇出)하는 형상까지 지니고 있고, 매봉산은 매우 여름철 건장하고 기상이 건재한 사람의 넓적다리 형상을 이루고 있고, 토정봉은 만물을 번식시키고 살찌게 하는 조물 주체로 보고 있다.
이들 내용의 기록보면 전방에는 매봉(鷹峯)이 있는데 꿩이 매를 보고 숨은 형상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 또 다른 흥미진진한 전설 이야기가 있다.
꿩의 머리 부분에 묘를 썼는데, 최초로 정무공으로 시작하여, 이하 자손들이 자리하고 있어, 조상 어른 신이 목마르면(꿩신) 옥수(玉水)를 가두어 마시게 하였는데, 인위적으로 옥련지를 만들어, 물을 먹을 때 더욱 더 조심하여 물을 먹게끔 하기 위하여 연못에 연꽃을 심었다고 한다. 연못 가운데에서는 정무공
묘 위치 방향으로 10척 이동한 곳에다 인공 섬을 만들어 꿩이 숨어서 물을 마시라고 대나무도 심었다고 구전(口傳)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필자는 이곳을 풍수지리상 풍수사적지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하여 본다.
정무공의 선영은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국동리에 현존하고 있다. 특히 풍천 노씨인 노부인은 품(品) 자형으로 정무공의 3인의 부인 중 뒤편에 안치[품(品)자형으로 정무공 부인 3인 중 뒷 편에 풍천 노씨] 되어 있다.
그리고 국동마을엔 샘들이 3곳에 있는데 향나무샘, 통샘, 가운데 샘들이 계곡에서 모아서 만들어진 옥수의 샘물이 있었는데 향나무샘은 60년대 새마을 도로확장 사업으로 매몰되었고 지금은 2곳(가운데샘, 통샘) 만 남아있다.
이곳 샘물에서 조석으로 아녀자들이 쌀과 보리, 야채 등을 신선하게 조리하여 음식 맛을 내며 갈증 날 때 한없이 먹어도 물맛이 좋은 가운데 샘이다. 이젠 그 손길들이 멀리 떠난지 40년 정도가 되었다. 샘물이 매우 깨끗하고 맑다. 이곳은 상부에 좋은 혈터의 영향도 있다. 예전에는 이곳 우물가에서 온 마을 주민 즉 국동리 2반 주민이 빨래 방망이질 을 하면서 한풀이도 하고 세상살이 이야기도 하였다. 샘물이 흘러가서 모아진 물들이 옥연지의 연못을 이루고 있다. 우물이 맑은 것을 보면서 풍수지리학 적이나 민속학적인 전통 우물 역사문화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 연못에 얽힌 옥연지(玉蓮池) 실화와 설화
정무공 공주목사의 묘 주변에 축대를 만들고 단장하기 위한 관련 흙을 국동마을 입구의 논에서 조달하여 정무공 묘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선영 터에 토사 조성시 조달된 논은 연못이 되었고 그 연못은 속을 단장하여 옥연지 (玉蓮池)를 만들게 되었다. 지세는 꿩이 업드려 날개 짓을 하고 숨은 복치형(伏雉形)인 은둔 자세의 형태를 하고 있다. 우측은 백호, 좌측은 청룡이다. 청룡 앞쪽에 옥류천과 용두천(현재는 성두천이지만/오룡골이 존재하니 이를 증명)이 시작하는 임수가 있다. 뒷쪽에는 거산(꿩)의 등을 형상하고 있어 이를 칭하여 배산임수 복치형 이라고 한다. 이 후 여러 후손의 묘를 같이하고 있다.
국동마을을 보호하여 주는 산[큰산, 국사봉(國士峰)]에서 살고 있는 산신인 호랑이를 달래고, 마을의 안위를 위하여 술, 고기 ,떡을 산으로 올려 한곳에 저장하여 제사를 올린다. 이때, 산신인 호랑이는 불을 싫어하므로 밤새 불을 피우고 멀리하며, 제사를 준비하는 마을회관에는 황토 흙도 동글하게 놓고 제사음식을 만들고 제사 종사자는 육신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목욕하고 제복도 단정히 입고 제사를 실행한다. 이때, 마을 주민이나 짐승들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