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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공지사항

 
정육(鄭堉: 1795~1863)의 매화 36詠 시집과 관련논문 비교
관리자
작성일 : 20-04-26 20:15  조회 : 1,398회 
    조선시대_매화시의_전개와_특징.hwp (80.0K) [12] DATE : 2020-04-26 20:15:08
    정육의_매화_36영_11.hwp (7.6M) [10] DATE : 2020-04-27 18:24:55
정육(鄭堉: 1795~1863)의 매화 36詠 시집과 관련논문 비교
    
     

정육(鄭堉: 1795~1863)의 매화 36영의 시집을 본인이 직접 소장하고 있다. 매화를 주제로 쓴 신위(1769~1845, 매화 36영)와 정학연[1783~1859(매화 30수)/정다산의 장남]의 시에 대하여 재조명하여  비교분석이 필요하다. 특히 시중에 나온 논문이 정육(鄭堉: 1795~1863)의 매화 36영의 시집은 논하지 않고있다.

* 참고 : 정육(鄭堉): 규장각에 전하는 『조선인보朝鮮印譜』(古 2400-2)는 책의 표지 제목만이 다를 뿐 『보소당인존』을 재편집한 책이다. 신위가 편찬한 『보소당인존』이 이후 조선의 인장문화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과 한양대 박물관 등지에는 『보소당인존』의 인영으로 만든 병풍이 전한다. 10폭 혹은 12폭의 대형 병풍을 활짝 펼치면 붉은 꽃잎들이 천지에 흩어져 내리는 듯하다.
   신위는 정육鄭堉이 편찬한 『고금인장급화각인보古今印章及華刻印譜』에 서문을 요청받았다. 이 서문에서 신위는 인장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비록 고아하고 비속한 것들이 섞이는 병통이 없지는 않지만, 금석학의 연구에 도움이 되고 고금古今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신위는 이 서문에서 좋은 인장의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굳셀 것[勁], 모날 것[方], 고풍스러울 것[古], 그리고 어딘가 졸박할 것[拙].    

 

첨부파일 조선시대 매화시의 전개와 특징.hwp

 

첨부파일 조선시대 매화시의 전개와 특징.hwp

http://blog.naver.com/bhjang3/140202757807

 

조선시대 매화시의 전개와 특징

매화는 추운 겨울을 견디며 꽃망울을 터트리는 생태적 특성이 성리학적 사유와 결합하여 생생지리(生生之理)’를 가장 잘 구현한 식물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에 매화는 사대부로부터 이처럼 각별한 의미를 부여받으며 지속적으로 시창작의 소재가 되어 왔다. 이 글은 조선시대의 매화시 창작을 전기중기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 것이다. 조선 전기 매화시를 많이 남긴 작가로는 서거정(徐居正)김시습(金時習)김안로(金安老)가 주목된다. 이 중 김시습의 매화시에는 세속과 타협하기를 거부하며 고독하게 자아를 지키고자 한 方外人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으며, 김안로의 매화시는 유희적 성격을 지닌것이 특징적이다. 조선 중기에는 이황(李滉) 및 그 제자들의 매화시와 김수증(金壽增)金昌協김창흡(金昌翕) 안동(安東) 일문(一門)의 매화시 창작이 주목된다. 심학(心學)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인간 내면의 수양을 강조한 이황은 많은 매화시를 남기고, 제자들과도 즐겨 매화시를 화답했다. 이황은 매화와 묻고 답하는 형식의 매화문답시(梅花問答詩)를 창안했는데, 내면의 청진(淸眞)을 되새기며 출처의 의리를 자문자답 하는 내용의 매화문답시는 후대 문인들에게 널리 계승되었다. 김수증김창협김창흡은 살벌한 정쟁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고 진은(眞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매화시를 창작하였다. 이들의 매화시에는 소옹(邵雍)의 상수학(象數學)적 영향이 두드러져 보인다. 조선후기 18세기 중후반에는 시사(詩社) 집단의 매화시 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빙등조빈연(?燈照賓筵)’이라 이름 붙인 노론 계열 문사들의 매화시, 경화세족과 서얼 시인이 함께 한 매사(梅社) 동인의 매화시, 그리고 이덕무(李德懋) 일파의 납매시(蠟梅詩) 창작 등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경향이었다. 19세기에는 신위(申緯), 정학연(丁學淵), 조병현(趙秉鉉), 이학규(李學逵) 등이 각기 수십 수에 달하는 많은 매화시를 남겼다. 이중 신위와 정학연은 축윤명(祝允明)매화백영(梅花百詠)을 수용하여 수십 수에 달하는 매화연작시를 짓고 있음이 특징적인 현상이다. 조선시대의 매화시를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의미는 주역과 관련한 역리(易理) 상징으로 여겨진다. 조선의 사대부가 지속적으로 매화시를 창작한 저변에는 동지를 맞이해 일양(一陽)이 처음 싹트는 부괘(復卦)를 떠올리며 거기에서 생생지리(生生之理)를 사유하며 천도의 어김없는 순환을 체인하는 성리학적 사유가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