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인쇄 | 네이버 블로그 | 다음 블로그               

 
 
 아이디 저장하기
 



원장 인사말 동정 비전과 목표, 연혁 CI 소개 국부연 지부 조직 및 운영 국유재산 담당부서 및 관계기관 연구 공지사항 찾아오시는 길

연구 공지사항

 
[고서연구] 김입(金笠)보다 시(詩)에 능한 선비 문신 정하언과 그들 친구들
관리자
작성일 : 20-07-07 17:28  조회 : 1,331회 

김입(金笠)보다 시(詩)에 능한 선비 방랑 시인
『조선 후기 정하언(鄭夏彦 )과 그들 친구들』


조선시대 문신 정하언 공은 평생동안 국내 일주하며 벼슬생활을 하시다가 한세상(1702~1769)을 보냈다.
방랑하면 조선시대 김입(金笠)의 김삿갓을 말하지만 공직자로서 방랑하면 옥호 정하언 공을 들 수 있다. 그가 평생에 남기고 간 시문을 음미할 가치가  매우 높다고 말 할 수 있다.
 
공주목 동헌에서 1702년(숙종28년, 임오년) 11월18일에 태어나서 2살에 아버지를 5살에 어머니를 5세에 조실부모하고서 충청도 부여현 옥호동댁(청풍정 부근)에서  배다른 하성형님과 안동김씨 와 남양홍씨 형수님슬하에서  친 누님과 함께 같이 기거하였다.

그가 어렸을 때 모습은 청풍정 기문에 의하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童子時所遊間又得玉壺小洞於釣龍臺之上自京
搬下結茅而居者殆數年每興發輒拏孤舟從
龍臺而下歷皐蘭之寺落花之岩羅浮之山維舟於溫臺下
杖策登其上巨石平鋪可坐十百人盤桓久之從回微逕而
憩于倉舍如是者殆月二三間雖不免捨去奔走爲鴟鷺之
笑而夢魂未嘗不在其間遇吏於是者輒勸其稍拓其規以
待遊者而迄未聞今得

 

나는 부여에서 어려서 놀던 곳이다. 옥호라는 작은 동네는 조룡대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에서 여러 해 이곳에 내려와 시골 생활을 한곳이다.
매번 기분이 좋으면 바로 나홀로 배를 젓고, 조룡대로 고란사로 낙화암으로 부소산으로 다니다가 자온대에 배를 매어놓고 지팡이를 짚고 위로 올라가곤 한 곳이다.
그곳 자온대의 반듯한 큰 바위는 여러명이 앉아 놀기가 편한 곳이다. 머뭇거리고 돌아다니다가 오솔길의 지름길로 내려와 이곳 자온대 부근 사창에서 쉬어가곤 하였다.
             


이런 것을 한 달에 두 세 번식 하였다. 이런 것을  벗 삼아  강물위에 새들을 비웃는 듯 하나 내 꿈엔 평생 잊어 본때가 없다는 청풍정 기문이 있다.
그리고 공부에 도전방법이 대단하였다.

 

◎ 숯 글씨 쓴 감잎이 백마강을 검게 덮다.

어린 하언공은 서형과 형수의 극심한 보살핌을 받았으며, 남달리 글에 대한 읽기와 쓰기를 좋아하였다. 당시 구전으로 전수된 내용을 보면, 어린 시절 하언공이 고란사에 들어가 갖은 궂은일을 다 하면서도 감나무 잎사귀에 검정 숯으로 글씨를 수없이 쓰는 것을 반복하여 감잎 위에 글을 쓴 분량이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검붉게 덮을 수 있을 정도라고 전해진다.

 이는 어린 하언공이 일찍 부모님을 여윈 가운데에도 수 많은 고난을 겪었으나, 불철주야 끊임없이 열심히 노력하여 모든 역경을 딛고 자신을 갈고 닦으며 이겨내는 사실적 모습을 너무나 생생히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온다.
하언공의 이러한 노력은 분명히 훗날 하언공이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 및 지방의 중요 직책을 맡은 관리가 되어 충의와 함께 책무를 공정히 수행하고, 또한 시문과 문장을 훌륭하게 저술하고 즐길 줄 아는 조선 최대 문인 중의 일인으로 인정받게 될 수 있는 원초가 된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최수 홍산 현감은 하언공의 선친이 지방수령을 같이 한 정무공의 자제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언공이 어린나이에 조실부모하고 고란사에서 허드레 일을 도우며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언공의 걸출한 체격과 인품, 언행 등을 눈여겨 살펴보고 앞으로 대성할 인재감이라고 판단, 고란사 주지에게 모든 경비를 댈 터이니 하언공이 오직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배려를 부탁하였다고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는 12세(1714년)에 과체시(향시)에 시험 “하량재별소통국(河梁再別蘇通國)지어내니 주변 사람들이 매우 놀라게 하였다. 당시 15세(1716년)에 유림들이 모여서 시를 겨누는 대회 초청을 받기까지 하였으나, 그는 앞으로 진사시 준비를 하기위해 참가 승낙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18세에 결혼을 하고 그 후  19세(1721년 경종원년, 신축년)에 진사시을 합격하였다.

그의 결혼담에 내려오는 구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실부모한 정하언 총각은 부여현 옥호동에서 홀로 자라 성년이 되었으나 결혼 배필 자리가 나타나지 않아 혼기를 넘기고 있었다. 당시에는 조혼이 관습이라 남자나이 14세 넘으면 노총각으로 보는 풍습이 있었다. 하언공이 17세 노총각으로 있을 때, 공주시 신풍면에 풍양조(趙)씨가 집성촌으로 세거하고 있었다. 조선후기의 명문가인 풍양조씨가(家)의 조석명은 당시 조최수 홍산현감(1720년경 재임)이 공주시 신풍면에 살고 있는 조석명(5촌: 숙질 간)에게 하언공의 됨됨이가 매우 훌륭함을 전달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규수 감을 슬하에 둔 조석명은 금강변(현 세종특별시)에 있는 금벽정에서 친부 사인공(조석명의 부친)을 뵙고 곧 바로 뱃머리를 고란사 쪽으로 돌려 하언공을 만나려 갔으나 하언공은 자신의 남루한 옷차림으로 인하여 면담을 수차례 걸쳐 거절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언공은 공주목사 정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미 공주지방에 있는 명문가에서 어느 정도 명성은 조금씩 알려져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풍양조씨가(家)인 조석명의 집요한 청에 의해 결국 만남이 성사되었으며, 조석명은 사위 깜으로 한번보고 외동딸과 결혼을 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외동딸은 1707년 3월13일(정해년,숙종33년)생이며 본관은 풍양이고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조석명이다.

결혼을 앞두고 하언공이 지은 시문을 보면 매우 걱정스런 시문이다.


 결혼(結婚)
粗依/ 而慾以開月爲過婚而私
幸晤非遠矣/ 比來連得士修運
元大瞻之計/此賓關朋傍間運
厄遠地孤懷/量不能自聊
              
[해설]
어렵게 살면서도  다음 달에 결혼하네!
행복에 이어 미래의 벼슬길에 선비로서 수양할 바를 얻고자 하네!
큰 꿈을 설계하며 나와 가까운 친구와 가족들이 미래를 설계하자!
굿은 일을 멀리 보내도 고뇌와 외로움이 많아 홀로 즐기는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다음 연재는 과거 시험 합격과정 마음조리며 쓴 시문들